한줄평
왜 돈 쓰고 고생하면서 여행을 떠나야 하는가? 여행이란 무엇인가?
목차
추방과 멀미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오직 현재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노바디의 여행
여행으로 돌아가다
추방과 멀미
'난생처음으로 추방자가 되어 대합실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진귀한 경험인 만큼, 소설가인 나로서는 언젠가 이 이야기를 쓰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너무 고심하지 않는 편이다. 운 좋게 맛있으면 맛있어서 좋고, 대실패를 하면 글로 쓰면 된다.'
저자는 중국으로 여행을 위해서 당연히 준비해야 할 비자를 준비하지 않아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으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소설가에겐 오히려 이런 일이 반가운 걸까? 아니 분명 이는 반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값비싼 편도행 티켓과 이미 결제한 숙박비와 식비가 아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책에다 글로 적음으로써, 대외적으로 글로 알림으로써 정신적인 승화를 이루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느 식당에 가서도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고 한다. 맛있어도 혹은 진짜 맛이 없어도 어느 쪽이든 성공하는 나름의 멋진 방정식을 세운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났지만 이 세계가 자신이 생각해 왔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과 짐승, 문화와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와 그것을 동방견문록으로 남겼다.'
'여행담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 형식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늘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난다. 로널드 B. 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에서 '추구의 플롯'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플롯이라고 소개한다. 주인공이 뭔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들로, 탐색의 대상은 주인공의 인생 전부를 걸 만한 것이어야 한다. (중략...) 이처럼 '추구의 플롯'으로 구축된 이야기들에는 대부분 두 가지 층위의 목표가 있다. 주인공이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것(외면적 목표)과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추구의 플롯'에 따라 잘 쓰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을 달성하도록 하고, 그런 이야기가 관객에게도 깊은 만족감을 준다.'
'어쩌면 그는 비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최소한 비자가 필요한지 알아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최소한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는 중국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겪은 정신적 멀미의 괴로움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그가 처음으로 가본 외국이었고, 젊은 날의 호나상이 깨져나간 곳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찾은 중국에서 추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오히려 안온함을 느꼈다. 그는 비로소 오래 미루던 소설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다. 아내는 집 밖으로 절대 나가선 안 된다고 다짐을 두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이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집을 떠난 여행자는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얻어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그런 점에 있어서 여행은 항상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재밌고 동시에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나는 호텔이 좋다. 모든 인간에게는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반복적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는다거나, 철저히 혼자가 된다거나, 죽음을 각오한 모험을 떠나야 한다거나, 진탕 술을 마셔야 된다거나 하는 것들.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이런 경험을 '복용'해야, 그래야 다시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다. 내 경우는 이렇다.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을 떠나 낯선 도시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예약해 둔 호텔에 도착하고, 호텔 예약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음을 확인하고, 방을 안내받아 깔끔하게 정리된 순백의 시트 위에 누워 안도하는, 그런 경험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누군가가 히말라야의 팔천 미터급 고봉에 올라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안전하게 귀환하는 것을 반복하듯이,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 안전함을 느끼는 순간을 그리워하는데, 그 경험은 호텔이라는 장소로 표상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프로그램의 근원도 이제는 알 것만 같다. 나의 유년은 잦은 이주로 점철되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하여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원경험들이 쌓여, 그것이 프로그램으로 내 안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을 프로그램이라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깨달은 자신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밝힌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나의 프로그램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나의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거 같다.
'어떤 인간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과한 뒤, 그 고통이 자신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때 경험하는 안도감이 너무나도 달콤하기 때문인데, 그 달콤함을 얻으려면 고통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안의 프로그램은 어서 이 편안한 집을 떠나 그 고생을 다시 겪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한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이다. 벨맨이 가방을 받아주고 리셉션의 직원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 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의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 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들의 냄새까지 지워야 하니까 호텔에선 가정집보다 훨씬 독한 세제와 방향제를 쓴다. 호텔에 들어설 때마다 맡게 되는 그 냄새, 분명 처음에는 자연의 어떤 향을 흉내 냈겠지만, 어느 순간 그 근원을 몰각한 듯한, 아니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한, 이제는 그저 세제와 방향제 냄새로만 지각되는 그 익숙한 향의 습격을 받는다.'
오직 현재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처음 간 것은 1997년이었다. 아직 크메르 루즈 잔당들이 밀림에 남아 있을 무렵이었다. 이년 전, 밀림 속으로 유적을 보러 갔던 젊은 서양 여성이 캄보디아인 가이드와 함께 크메르 루즈의 총에 맞아 살해된 일로 여행자들은 위축돼 있었다. 여행 직전에는 신임 총리 훈센을 노린 폭탄 테러가 프놈펜 시내에서 발생하기도 했다. 그는 무사했다. 너무 무사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는 캄보디아의 총리다.'
'발상은 무게가 없다. 지혜도 그렇다. 기술도 마찬가지. 그래서 이런 무형의 자산을 가진 사람은 어딘가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먹고 살기에도 유리했다. 마찬가지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도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찾아 천하를 유랑했다. 솔닛은 음악가와 의사도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유랑 생활을 했다고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의사가 왕진을 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구급차가 없던 시절, 움직이기 어려운 환자를 돌보려면 의사가 가방에 간단한 의료기구를 넣어 찾아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전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에마 보바리의 남편 샤를도 왕진을 다녔다.'
'소설가는 어떨까? 나는 전업이니 어디 묶여 있지는 않다. 구상과 집필 능력은 무게가 없어 어디로든 지고 다닐 수 있다. 전 세계의 많은 작가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뉴욕이나 바르셀로나, 런던, 파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때 나도 그런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작가들은 주로 영어나 스페인어를 쓰고 있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페루에서 태어났지만 마드리드에서 산다. 칠레 출신의 이사벨 아옌데는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 살만 루슈디는 뭄바이에서 태어났지만 런던을 거쳐 지금은 뉴욕에 정착했다. 작가의 뇌는 들고 다니기 어렵지 않지만, 그 뇌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는 모국어로 짜여있다. 작가는 모국어에 묶인다.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나의 조국은 모국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망명이나 피난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마이너 언어권에 속한 작가는 모국어가 양수처럼 편안히 감싸주는 곳에 있으려 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모든 게 현재시제로 서술된다. 과적 픽업트럭에 실려 이동하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밀림 속으로 글어가고,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유적의 규모와 그 유적을 부수어버릴 듯 맹렬히 자라고 있는 나무의 위용에 압도된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라는 주체가 있지만, 그 주체를 초월하는 생생한 현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원경으로 밀려난다. 범속한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오는 이러한 초월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 유통되지 않고 재고로 남은 기억은 창고 깊숙한 곳에 묻혀 잊힌다. 고대 그리스와 달리 이제는 생각을 들고 몸소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그것은 책으로 묶여 도매상과 서점을 통해 스스로 돌아다닌다.'
여행하는 인간, 호모비야토르
'인류는 이상한 종족이다. 인터넷이 막 보급될 무렵 여러 미래학자들이 여행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 예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뉴욕이나 파리에 몸소 가지 않고도 자기 집 소파에서 충분히 다 구경할 수 있다고 생각했 던 것이다. TV는 영화관을 대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비디오플레이어가 대중화될 때도 비슷했다. 그러나 영화관을 찾는 관객수는 아직까지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굳이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 공기도 별로 좋지 않은 극장까지 가서 옆자리 사람의 팝콘 씹는 소리를 견디면서 영화를 보고 있다. (중략...)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꼼꼼하게 살필 수 있는 코너도 있다. 직접 가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모든 면에서 현장에서 감상하는 것보다 낫다. 다리도 아프지 않고, 티켓값도 아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떠난다. 가서 거기 있고 싶어 하고 직접 내 몸으로 느끼고 싶어 한다.'
'인류는 치타처럼 빠르지 않고,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인간에게는 무시무시한 이동 능력과 지구력이 있었다. BBC 방송의 다큐멘터리 <인간 표유류, 인간 사냥꾼 Human Mammal, Human Hunter>은 '인간은 특이한 타입의 포유류이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초기 인류의 사냥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칼라하리사막의 한 부족은 집단으로 쿠두 영양 사냥에 나서는데, 이들의 방식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들은 사냥감의 냄새와 흔적을 따라 뛰고 또 뛴다. 목표를 무리에서 고립시키면서 추적을 계속한다. 땡볕 아래에서 그들은 무려 여덟 시간이나 영양을 쫓는다. 그들이 사냥감을 마침내 잡게 되는 것은 누군가 활을 잘 쏴서도 아니고, 창을 잘 던져서도 아니다. 영양은 탈진하여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그러면 그들은 창을 들고 사냥감 가까이 다가간다. 탈진한 영양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신을 집요하게 추적해 온 포식자에게 몸을 맡기듯 눈을 끔뻑인다. 사냥꾼은 창으로 단번에 사냥감을 죽인 후, 흙을 뿌려 여덟 시간 동안 자신들의 추적을 따돌린 쿠두에게 존중을 표하고 머리와 몸을 정성스럽게 쓰다듬는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환의 흔적이고 문화일 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위험한 데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여전히 인간은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니 인터넷 시대가 되면 수요가 줄어들 거라던 여행은 오히려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나에게 여행은 일종의 중독인가? 그럴 수도 있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하 '알쓸신잡')은 여행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은 다른 도시로 간다. 그리고 돌아온다. 가기는 함께 가지만 도시에 도착하면 흩어져 개별적인 여행을 한다. 저녁에는 식당에 모여 대화를 한다. 모든 대화가 그렇듯이 이 대화들은 가지를 치며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기도 한다. 우리는 밤늦게 혹은 다음날 아침에 서울로 돌아온다. 함께 떠났던 이들이 각자의 여행을 하고 저녁에 만나 대화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이 여행의 이상함은 출연자와 제작진, 시청자가 이 여행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있다.'
'시즌1의 첫 촬영지는 경상남도 통영이었다. 버스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우리 출연자들은 제작진들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를 못했다. 그들이 거듭하여한 말은 '알아서 여행하시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동행하고 싶으면 하고, 혼자 가고 싶으면 가고,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저녁식사 자리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파리에 풀어놓은 별로 위험하지 않은 동물인 셈이었다. 우리가 알아서 돌아다니면 제작진들이 그걸 찍을 거라고만 했다. 출연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일단 점심을 먹으러 갔고, 거기서부터 각자의 여행을 시작했다. 그 순간 이 프로그램의 주요한 특성이 정해졌다.'
'이 여행이 매우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 순간, 완성된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매주 금요일 밤이었다. 그전까지 나의 모든 여행은 확고하게 일인칭이었다. 나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한 코미디언이 비싼 포르셰를 샀지만 막상 자기가 운전을 해보니 포르셰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더라. 그래서 친구에게 포르셰를 운전하라고 시킨 뒤 택시를 타고 따라갔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그가 택시 기사에게 저기 가는 저 포르셰 가 차기 차라며 정말 멋지지 않느냐며 자랑을 하자, 택시 기사는 어이없어하며 그런데 왜 택시를 탔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보 아니세요? 내 차에 타면 포르셰가 안보이잖아요?"'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운전자는 일인칭이다. 운전을 하는 자기 모습을 보는 것보다 차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시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행도 마찬가지. 멋진 곳에 가서 놀라운 것을 경험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일인칭의 경험이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셀카를 찍어보지만, 셀카는 기본적으로 일인칭의 거울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알쓸신잡> 같은 여행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되면 나는 '여행하는 나'를 삼인칭 시점으로 보게 된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나를 찍기 때문에 그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열여덟 시간 동안 했던 말과 행동 중에서 일부가 적나라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나는 조금은 부끄러운 기분이 되어서 화면을 바라본다. (중략...) 다른 출연자의 여행도 그때에야 비로소 보게 된다. 촬영 중에는 대체로 다른 출연자의 여행에 대해 들을 뿐이다. 그가 실제로 뭘 보았는지는 전적으로 그의 말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한 출연자가 다른 출연자에게 자신의 개별적인 여행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하려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잘 말해야 한다. 다른 출연자들은 그의 말을 듣고 가보지 않은 그곳을 상상할 뿐이다.'
'영어에는 'armchair traveler'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말로 바꾸자면 '방구석 여행자'쯤 될 것이다. 편안한 자기 집 소파에 앉아 남극이나 에베레스트, 타클라마칸사막을 탐험하는 여행자를 조금은 비꼬는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는 모두 '방구석 여행자'이다. 우리는 여행 에세이나 여행 다큐멘터리 등을 보고 어떤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곳을 다녀온다. 그러나 일인칭으로 수행한 이 '진짜' 여행은 시간과 비용의 문제 때문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그곳을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 우리는 또 다른 여행서나 TV의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가 이미 다녀온 곳을 그들이 여행하는 모습을 읽거나 보게 된다. 나와는 다른 그들의 느낌과 경험이 그들의 언어로 표현되어 내 여행의 경험에 얹힌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 층에 간접경험을 쌓여 그 위에 직접 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2011년 가을에 나는 뉴욕에 있었다. 그 무렵 뉴욕의 가장 큰 이슈는 단연 '월가를 점령하라 Occupy Wall Street' 시위였다. 월가 인근의 주코티공원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월가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꽤 오랫동안 전 세게의 주목을 끌었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월가의 금융회사들로부터 촉발되었고, 그로 인해 전 세계가 고통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은 월가 금융기업들의 무분별한 탐욕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들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처벌은커녕 그들은 보상을 받았다. 대규모 공적 자금이 거대 금융기업들의 파산을 막기 위해 투입되었고, 이 와중에도 거액의 연봉과 보너스를 챙겨간 경영진들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이런 분위기가 '월가를 점령하라'시위로 이어졌다.'
'주코티공원은 자생적으로 작은 도시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텐트들이 모여 있는 주거지역과 토론과 회의가 열리는 일종의 아고라 같은 공적 공간이 나뉘었다. 누구든 받아들여졌다. 노숙자, 실업자, 성소수자, 공산주의자와 음모론자가 한자리에서 담배(혹은 비슷한 무엇)를 나눠 피우며 어울렸다. 나와 같은 여행자들만이 예외였다. 그들은 나처럼 카메라를 들고 와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피자를 얻어먹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게 전부였다. 골판지에 주장을 적어 들고 있거나,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았다. 모두가 동등하고, 모두가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은 그곳에 '그림자'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세금을 내고, 그 나라의 운명에 자기와 자기 가족의 미래가 걸려 있는 사람들,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지는 짓들이 자기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문제였다. 나와 같은 여행자는 떠나면 그뿐이었다. 여행자는 관찰하고 기록하고 때로는 일시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떠나간다.'
'그림자는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원권'일 것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타인이 우리를 사람으로 받아들여주어야 한다.'
'페넬로페의 침대에 누운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때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의 침대에서 매일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자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혜의 여신이 그를 다시 고난의 여행길로 끌어냈고 그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기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곳으로 돌아갔다. 자주 떠도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오디세우스와 같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방랑을 멈추고 그림자를 되찾을 수 있는 어떤 곳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까? 과연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나는 거기에서 받아들여질까?'
아폴로 8초에서 보내온 사진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행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신생아는 자기가 도착한 나라의 말을 모른다. 부모와 친척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몇 년을 도와야 비로소 기초적인 언어를 익힐 수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사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여행자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갈 때, 남아있는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환송한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문영은, 마치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를 배웅하듯 망자를 대한다. 관 속에 노잣돈이나 길동무 인형을 넣어준다. 철저한 무신론자조차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면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 왔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절실한 것을 제공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 거의 모든 문명에, 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계율들이 남아있다.'
'이런 환대는 정말 고맙지만 드물지는 않았다. 환대의 관점에서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면,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쑥 튀어나와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지하철역으로 꼽히는 도쿄의 신주쿠와 시부야역에서, 대중교통이 끊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발리의 우붓에서, 영어가 한마디도 안 통하는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에서 이름 모를 이들이 출구를 알려주고, 차를 태워주고, 종교 축제에 데려가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이십여 년 전,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샤워는 큰 물통에 받아놓은 빗물로 하던 시절의 발리. 혼자 여행하는 나에게 현지인 남성이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뉴먼이었다. 뉴먼은 나에게 우붓과 그 일대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표정이 밝고 선했다. 나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50cc 혼다 오토바이를 가리켰다. 그는 나를 태우고 먼저 자기 가족에게 데려갔다. 갓난 사내아이와 그의 부인이 그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뉴먼의 가족을 사진으로 찍었다. 뉴먼은 가족사진이 처음이라며 나중에 그 사진을 꼭 보내달라고 했다. 그는 나를 인근 사원에서 열리 는 대규모 힌두교 종교 행사에도 데리고 갔다. 여행자는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수천 명의 인파가 사원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그를 따라 잠깐 힌두교도가 되었다. 사제가 내 이마에 성수를 바르고 뭔가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하루종일 그는 평범한 관광객이 쉽게 볼 수 없는 곳들로만 나를 데려갔다. 그에게 준 것이라고는 오토바이 기름값과 약간의 사례비였는데 서울에서는 밥 한 끼도 못 사 먹을 정도의 액수에 불과했다. 그는 분명 돈을 받고 나를 안내했지만, 그가 베푼 것도 일종의 환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의 가족을 만났고, 그가 믿는 신과 그 신이 사는 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온전히 믿어야만 했다. 나의 신뢰는 그의 환대로 돌아왔다.'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가 지구상에 여행자로 태어나서 여행을 하다가 여행을 끝마치고 떠나간다. 누군가의 환대가 없었다면 이어지지 못했을 여행(혹은 인생)인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의 환대와 도움을 받아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감사하고 지구상에 태어난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노바디의 여행
'다시 말해, 자신은 트로이 전쟁의 승자인 아가멤논의 백성이고, 또한 제우스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어서 자신을 알아보고 대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클롭스는 코웃음을 치고 바로 그들 중 두 명을 마치 강아지처럼 움켜쥐더니 땅바닥에 내리친 다음 토막 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산속에 사는 사자에게 내장이며 고기며 골수가 들어 있는 뼈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우 것으로 대답한다. 오디세우스가 위험을 자초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호메로스의 서술에 따르면 그것은 오디세우스의 허영과 자만심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키클롭스의 동굴을 제 발로 찾아간다. 원래 당도했던 섬에도 부족한 것은 없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키클롭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난공불락의 트로이가 누구 덕에 함락되었는지 알아? 용맹한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바로 나, 트로이 목마를 고안한 영리하고 꾀 많은 오디세우스님 덕분이다.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는 무인도에 도착했지만 오디세우스의 마음은 어딘가 허전했던 것이다. 말 못 하는 염소 떼뿐이었던 것, 배가 채워지자 그의 마음속에 다른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인정의 욕구,. 낯선 땅에 사는 존재로부터 찬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고향 이타케에서는 와이었고, 트로이에선 영웅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언제나 섬바디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측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바다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나뭇잎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의 자아는 쪼그라들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여행자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여행지에서는 그저 이런저런 범주에 따라 분류될 뿐이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고향에서 받는 대접을 요구하고픈 유혹을 느꼈고 실제로 실행에도 옮긴다. 그러나 원하던 것을 얻기는 쉽지 않다. 현지인들 은 여행자에게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은 곧 떠날 것이며 잊힐 것이다. 오히려 여행자에게 너무 큰 관심을 갖는 현지인이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뜻이고, 그 필요가 너무 절박하면 그들은 폭력을 써 서라도 강탈하려 할 것이다. 이른바 '예의 바른 무관심' 정도 가 현지인과 여행자 사이에는 적당하다.'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 하러 그 먼 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로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남의 땅에서 우리의 힘은 약해진다. 약해지기 때문에 더더욱 자기 존재를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들의 환대와 인정, 선물이 필요하다. 물론 자본주의는 이런 습격을 부드러운 거래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거래로 모두가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어서 누군가는 동굴로 돌아온 키클롭스의 마음으로 외부인을 적대하거나 무시한다. 그럴 때 여행자는 더 큰 불안과 좌절을 겪고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행은 습격이 되고 여행자는 침입자가 된다. 그 결과는 불필요한 고난으로 여행자 자신에게로 돌아오곤 한다. 그러니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2800여 년 전에 호메로스는 여행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오디세우스의 변화를 통해 암시했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
여행으로 돌아가다
'마사이 족으로 산다는 것은 삶이 항구적인 여행 상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에게 똑똑함이란 소떼를 먹일 풀이 어디에 무성한지를 알아내는 능력이다. 행여 낙오하더라도 소떼가 남긴 흔적만 보고도 단박에 부족의 행방을 알아내고 따라잡는 재능이다. 지구상의 온갖 오지를 탐험한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들이 축적해놓은 지식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돌아올 지점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고 여 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돌아올 곳,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 내 집과 내 물건이 있는 곳은 여 정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여행의 원점. 여행이 실패 하거나 큰 곤란을 겪을 때 돌아갈 수 있는 베이스캠프. 그곳 에서 우리는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 라 믿는다. 마사이족의 청년은 달랐다. 여행의 목적지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오히려 고향이 유동적이었다. 육중한 돌로 지어진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수백 년 동안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아마 청년의 손자가 죽을 때까지도 어디론 가 옮겨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온 곳, 그의 부족은 늘 이동 중이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삶인 이들에게 여행이란 과연 무엇일까?'
'사람이 머물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난민은 전쟁이나 혁명, 폭동 같은 정치적 변란의 위험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 스탈린 치하의 소수민족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기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이나 시베리아로 보내지는 경우도 있다. 어린 날의 나처럼 부모의 임지를 따라 이동할 수도 있다. 외교관의 아이들도 많은 나라들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경험한다. 여행 역시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움직이지만 이주나 피난과는 다르다. 여행은 자기 결정으로 한다. 자기 결정은 통제력과 관련이 있다. 여행은 이주와 달리 전 과정을 계획하고 이를 통제할 수 있다. 비행기와 호텔, 렌터카를 예약하고 대부분의 경우 그대로 진행한다. 예산과 일정에 맞춰 가야할 곳을 내가 정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야 하는 이주자와 자기 졀정에 따라 여행하는 자가 보는 풍경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것은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이주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반면 여행자는 정제된 환상을 경험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주와 여행의 관계는 마치 현실과 소설의 관계와 같다. 현실은 어지럽고 복잡하고 무질서하다. 자잘한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고, 그중 어떤 것은 우리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수도 있다. 하지만 개개의 사건들에 일일이 주의를 기울일 수는 없다. 현실은 줄거리가 없다. 어떤 일들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때로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난다. 아름다운 별똥별이라고 생각하고 쳐다보던 무언가가 거대한 운석으로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질 수도 있다. 대단한 일처럼 생각하고 긴장했지만 별일 아닌 것으로 판명되기도 한다. 우주는 우리의 운명에 무심하며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지금도 나는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휴대전화 전원은 꺼졌다. 한동안은 누군가가 불쑥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승객은 안전벨트를 맨채 자기 자리에 착석해 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지러운 일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지는 순간이다. (중략...) 일상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해야 할 일ㄹ들, 그러나 미뤄두었던 일들이 쌓여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곤 한다. 조금씩 어떤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생긴다. 욕실에 물이 샌다거나, 보일러가 낡아서 고체해야 한다거나, 옆집이 인터리어 공사에 들어가 너무 시끄러워진다거나 하는 일들,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정리하면서
기본적으로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는 동안 몸도 괴롭고 돈도 잔뜩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루틴한 일상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루틴한 일상이란 예외가 끼어들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내가 예측 가능한 일들이 예측 가능한 순서로 일어나길 원한다. 하지만 여행에 가면 대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불안하고 불편하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여행에 재미를 붙일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이번 책을 읽게 되었다.
최근에 유럽 여행을 다녀오면서 비행기를 탔다. 총 시간 19시간 50분(대기시간 포함)이 걸렸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으로 스키폴 공항에서 5시간 30분을 기다려서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대기시간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탑승한 비행기에서 그대로 멀미를 시작했다. 식사로 고른 닭가슴살 메뉴를 먹고 나서 도저히 소화가 되지 않았다. 콜라 몇 잔을 연거푸 마셨지만 멀미 때문인지 속이 답답한 상태 그대로,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10시간을 버텨야 했다. 당시에는 정신도 없고 그저 이 고통이 어서 끝나기 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유럽의 여행을 끝마치고 온 나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유럽에서 가져온 기념품들과 사진, 동영상 그리고 추억이 남았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다음에야 내게 남은 것을 알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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